수족관 _ 유래혁 장편소설 / 마음은 고작 숨기려고 생겨난 게 아닌걸 / 기억에 남는 문장들

모든 게 넘쳐나는 요즘 시대는 책도 피해 갈 수가 없다. 매일 새로운 신간이 나오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홍보하는 문구들에 끌려 장바구니에 담다 보면 어느새 100권이 넘게 쌓인다. 나만 그런가...? 오늘 소개할 책은 내가 처음 봤을 때도 이미 나온 지 반년이 넘은 도서였다. 표지와 제목에 끌려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지만 계속 다른 것들을 담는 바람에 잊혀버렸다.

 

# 수족관

그리고 다른 책을 구매하러 간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이렇게 다시 발견한 것도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구매했다.

일본의 청량함이 느껴지는 듯한 표지와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혀있는 수족관이라는 제목. 처음에 표지를 봤을 때 사진집인 줄 알았던 책이다. 길어도 200p 후반 대이려나 했는데 376p의 꽤 긴 소설이었다. 종이가 얇고 매끄러운 편이라 상대적으로 책이 얇아보였나 보다.

 

# 목차 및 간단 리뷰

일단 가장 큰 특징을 꼽자면 작가님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감성적인 문장들이 굉장히 많다. 하나 예를 들자면 ' 우리는 서로의 얼마 안 되는 불을 훔쳐 가면서까지 빛을 내던 실로 작고 연약한 모래 알갱이였으니까. ' 이런 문장들. 인덱스 붙이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애먹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일본이 배경이고 주인공, 주변 인물들도 일본 사람이다. 일본 특유의 청춘물을 잘 표현하셔서 읽으면서도 좀 신기했다. 일본 소설 번역판 읽는 기분. 주인공도, 주인공 친구들도, 주변 인물들도 입체적이라 매력 있는 소설이었다.

보육 시설에 사는 주인공 류이치는 그 사실을 학교에 들키고 싶지 않아 늘 돌아가는 버스를 탄다. 다른 버스에 비해 언제나 한산한 버스에 어느 날 한 소녀가 타게 된다. 처음 만난 그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지갑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소녀의 짓이라고 짐작만 하던 류이치는 우연히 학교에서 그 소녀를 만나게 되고 이름이 아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에 아카리가 학교 옥상에서 보여준 비밀을 공유하고 아카리를 도와주게 되는데...

 

처음에는 나른하고 조용한 소설 속 분위기에 조금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님의 아주 조금씩 무언가를 쌓아 올리면서 그게 팡! 터지고 쌓아 올린 것들을 뒤적여 과거를 보여주는데 확실히 왜 앞에서 인물들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러니까 초반에서 중반까지는 후반을 위한 떡밥인 셈이다. 슬픔이 와르르 몰려오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수족관을 추천한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11
그녀의 말대로 삶은 어쩌면 평생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훔치고, 찾아내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P. 13
우리는 서로의 얼마 안 되는 불을 훔쳐가면서까지 빛을 내던 실로 작고 연약한 모래 알갱이였으니까. 바람이 불면 쉽게 흩어지고야 마는 외로운.

P. 26
그 당시 나는 이 세상이라는 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자들에 의해 겨우 그 온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P. 213
질긴 청바지조차 쉼 없이 적시고, 말리고를 하다 보면 결국 그 색이 바래고 마는데 마음이라고 별 수는 없지 않나.

P. 255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같은 압력의 슬픔을 견뎌야 한다는 걸 나는 지나치게 늦게 깨달아 버렸다.
P. 259 - 260
류이지. 인간에게 언제나 슬픔이 비처럼 내리고, 그걸 따뜻한 기억을 펼쳐 막아야 하는 거라면, 나는 평생 동안 쏟아지는 비를 내 힘으로 막아 본 적이 없어. 내 기억과 마음은 너무 어릴 때부터 고장이 났거든.
우산의 걸림쇠라 해야 하나. 꼭 아빠가 죽고 나서부터였을 거야. 그게 툭, 빠져 버렸는지 온 힘을 다해 마음을 펼쳐도 자꾸만 힘없이 접혀 버리기만 했어.
어딘가에 스며드는 비는 언제나 차갑고 눅눅했고. 어쩔 때는 따갑거나··· 뜨거웠지. 정말 질릴 만큼. 나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고치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괴로웠어. 쉴 새 없이 내리는 비가 너무나도 무서웠어. 이제는 너무 오래 맞아서 마음이 얼얼하고, 무감각하지만.

P. 349
' 수족관은 수족관이 아닌 척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오히려 더 수족관다워진다···. '

P. 357
마음은 고작 숨기려고 생겨난 게 아닌걸. 눈앞의 상대를 믿어볼 용기. 그런 게 있는 사람들이 내비치는 솔직한 표정을 나는 좋아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거라서 더더욱.

P. 361
그래. 나는 끝내 사람을 훔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던 거야. 아니, 어쩌면 엄마 말대로 평생을 그래 왔는데 그동안은 작은 것들로 참아 온 걸지도 모르지.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

문장들이 너무 예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