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_ 최진영 장편소설 /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푸른 뱀의 해라는데 뭔가 푸른 뱀이라니까 되게 좋은 기운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쯤 겨울에 읽은 책 리뷰를 올릴 줄 알았는데 이제 막 24년 9월의 책을 올리고 있는 나...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24년에 읽은 책들을 올리고 다른 포스팅을 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 해가 지는 곳으로

이 책을 기점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그래서 9, 10월에 오늘의 젊은 작가의 책들을 꽤 많이 읽었다. 그중 첫 책은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작가님의 장편소설로 이 시리즈에서 유명한 책 중 하나이다.

구의 증명, 오로라 다음으로 작가님의 소설은 세 번째인데 어떨지 궁금했다. 앞의 두 권은 극과 극으로 갈렸었기 때문.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물. 갑작스럽게 바이러스가 퍼진 지구,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열악한 환경 속 언제 어디서 약탈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작가님은 인간의 잔혹함과 이기심을 보여준다.

 

# 목차 및 간단 리뷰

그 잔혹함과 이기심을 보며 과연 나라면 저 상황에서 그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있는 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며 분노하기도 했다. 인간이길 포기하려는 것인가. 살아남는 게 가장 큰 목표가 되어버린 이들에게 과연 그런 식으로의 생존은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서로가 전부인 세상에서도 사람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 서로를 부둥켜 안고 오늘을 버티는 사람도 있다는 것. 이 모순이 어쩌면 우리를 이루는 것들이 아닐까.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그들 각자의 사정과 목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사하고픈 말들이 많았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19
미소는 잘 달린다.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미소는 원하는 만큼 달릴 수 없다. 내 손을 잡고 뛰어야 하니까. 그럴 때 나는 미소의 날개를 찢어발기는 악마다.

P. 21 - 22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은 우리 집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대출이 끝나면 저 대출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따금씩 우리는,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죽음을 밀어냈을 것이다. 고요하게 담담하게 각자의 인생을 삭감해 나갔을 것이다.

P. 24
여름은 어디에 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켰다.
저기, 해가 지는 곳에.

P. 42 - 43
도리가 내게 그것을 주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끝도 없는 길 위에서, 불행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 틈에서 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겐 꼭 필요한 농담과 웃음 같은 것.

P. 55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뜨리는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P. 97
같이 가야 해. 죽지 말아야 해.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고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야. 함께 있어야 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해.
P. 100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P. 131
나는 아주 고요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좋은 것을 지킬 것이다. 좋은 것은 소중한 것. 내 중심에 있는 이것. 그렇게 마음먹었다.

P. 142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 기회라고 말하지 마. 이게 최선이라고 말하지 마, 제발.

P. 158
이렇게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P. 171
우리의 기적.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을까.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 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