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숲 _ 천선란 연작소설 / 따뜻하게 서로를 보듬고 구원하는 SF 소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게을러서 아직도 7월에 읽은 책들을 포스팅하고 있는 나... 매달 어떤 책을 가장 좋아했는지 결산하는 포스팅도 올리고 싶은데 쓸게 너무 많아서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벌써 마지막으로 포스팅하고 2주나 지났다는 사실이 놀랍고 갑작스레 위기감이 들어서 올린다. 오늘 가져온 책은 내가 너무나 애정하는 작가님들의 콜라보와 너무도 좋은 이야기가 전부 담겨있다. 한마디로 이끼숲은 완벽하게 나의 취향이다.

 

# 이끼숲

천선란 작가님의 이끼숲. 이 작가님의 가장 유명한 책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천 개의 파랑이다. 나도 다시 책을 붙잡고 읽으며 좋아하는 장르와 작가님을 인식했을 때 많이 들었던 제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천 개의 파랑을 구매하러 간 서점에서 이 책을 먼저 발견했다. 표지를 보자마자 점선면 작가님의 그림첸데? 하고 놀랐다. 역시나 맞았다.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뒤편을 보았다.

책의 뒤편에는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가고 싶다, 고 적혀있었다. 천선란 작가님의 작품은 도서관에서 잠깐 훑어보는 정도로 본 적만 있지 완독 해본 작품은 없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보았던 작가님의 문체에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선란 작가님의 소설을 구매하러 온 참이었다. 고민 없이 이끼숲을 바로 집으로 데려왔다.

 

# 목차 및 간단 리뷰

책의 띠지에 작가의 말이 적혀있었다. " 구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다정하고 단호한 그 말이 이 글을 쓴 작가님과 너무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끼숲의 원고를 보냈을 당시, 우리 사회에는 안타까운 사고들이 벌어졌다. 그 사고들을 보고 작가님은 바다눈과 우주늪을 쓰셨다고 했다. 인물들에게 이름만 지어준 게 무책임하다고 느껴서. 덕분에 나는 여섯 아이들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섯 아이 들이라고 했지만 바다눈에서는 마르코가, 우주늪에서는 의주의 쌍둥이 자매인 의조가, 이끼숲에서는 소마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겨우 절반 혹은 그에 못 미치는 인물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아닌가, 하고 불만스러운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겐 마치 관객 참여형 공연을 보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보는 뮤지컬이 아니라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내가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은 배우를 따라다니며 관람하는 뮤지컬 말이다. 내겐 그 사람이 주인공이고 주인공이 조연일 테니.

아이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어떤 때는 마르코의 시선으로 톨가를 보았다가 또 어떤 때는 의조의 시선으로 치유키를 본다. 특히, 의조의 시선으로 치유키라는 인물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모두에게 똑같이 행동하고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게 설령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치유키도 의조의 앞에서는 조금 더 솔직해진다. 평소라면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문장을 서슴지 않으며, 친구들과 있지 않을 때면 미등록자를 죽이는 일을 한다는 죄책감에 자해도 한다. 그런 인간의 세밀한 감정선을 작가는 너무도 잘 표현한다.

모든 챕터가 슬펐지만 마지막 챕터인 이끼숲은 더하다. 유오가 죽은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슬픔도 덩달아 시작된다. 유오에게 위험한 일에 대한 제대로 된 경고도, 신고도,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소마의 처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오는 식물을 사랑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반짝이며 빛이 난다. 읽으면서도 유오가 얼마나 식물을 사랑하는지, 신이 나 조잘거리는 얼굴을 상상하면 기쁨과 웃음이 전염되어 입가가 움찔거렸다. 유오를 좋아하는 소마의 시점에서 서술된 마음들이라서 그랬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누구보다도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아이를 놓쳐버린 상황이 애석했다. 나도 ‘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 함께 떠나고 싶었다. 그곳에서 마음껏 슬픔을 느끼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싶었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38
'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수레는 레일에서 이탈하거나 뒤집혀. 책임감 없는 행복은 위험하고, 행복 없는 책임감은 고통스러운 거야. '

P. 78
"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마음에 쫓길 필요 없어. "
" 나는 ······ "
" 그래, 너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게 맞아. "

P. 83
" 모험과 도망. "
하나는 대범했고 하나는 조급했다.
" 발견과 추방. "
하나는 위대했고 하나는 초라했다.
" 미지의 세계와 타락한 세계. "
하나는 신비로웠고 하나는 두려웠다.
" 우린 산 채로 묻힌 거야. "
우리의 세계는 조급하고, 초라하고, 두려웠다.
" 이런 걸 산송장이라고 한단다. "

P. 105
증오에는 웃음이 필요해. 대상을 우습게 만드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 효과가 길지는 않아. 웃음 뒤에는 더 큰 증오가 오니까.

P. 107
뻔뻔해지고, 대범해지고, 강해지고, 비열해지고. 뭐든 괜찮아. 멍청해지지만 말자, 우리.

P. 117
웃는 걸 모르는 애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너 웃는 거 참 예뻐. 내 앞에서 더 자주 웃지 그랬어. 우리는 눈꼬리가 올라가고 쌍꺼풀 선이 얇아서 인상이 매섭잖아. 그래서 나랑 있는 너는 가끔 화가 난 건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았거든. 뭐, 네가 미안해서 그랬다는 건 알아.

P. 122
의주야, 나는 비밀일까? ··· 나는 제로잖아. 카운트되지 않는 존재.

P. 149 - 150
' 소마, 만약 네 앞에 아몬드가 있어. 근데 이게 독이 있는 야생 아몬드인지, 독이 없는 아몬드인지 몰라. 그럼 너는 어떡할 거야? 그 아몬드를 먹어볼 거야? 안 먹어? 궁금하지 않아? '
                                                                                           ···
' 나는 먹어보고 싶어. 내가 먹는 아몬드는 독이 없을 거라고 믿어. 나는 운이 되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그런 기회가 오면 내가 먹어볼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마. 내가 먹어보고 너한테 설명해 줄게. '

P. 153
그 애는 그렇게 나에게 불안을 선물했다. 나는 사랑을 줬는데.

P. 157
삶을 확장한다는 건 그런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겠다는 건 예측 불허의 위험이 가득한 어둠을 헤집는 일인 것이다.

P. 170
무모하고 위험한 건 싫다. 따분할 만큼 평온한 일상을 원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어떤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게 평화의 기본 조건이라는 걸 그 애를 좋아하고 나서야 알았다.

P. 184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외골수가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P. 186
비록 마르코는 별자리의 정확한 이름도 모르지만, 사랑한다는 게 반드시 그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므로, 잠들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충분한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P. 195
좋아하는 것을 대할 때 사람들의 표현은 이토록 닮아 있구나.

P. 197
' 사랑은 정말 체력이 필요한 일이야, 여러모로 '

P. 226
유오, 그리움은 가끔 변명이 돼.

P. 233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가고 싶다.

 

인덱스를 붙인 모든 것을 옮겨 적을 수는 없어서 몇 구절을 뛰어넘었는데도 이 정도로 많았다. 필사한 것을 컴퓨터로 옮기는데 구절을 볼 때마다 내용이 떠올라서 먹먹했다. SF를 떠나서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슬픔도 가득한) 소설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