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_ 손원평 장편소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나는 책에 밑줄을 긋기도, 책을 접기도 정말 싫어한다. 새 책이라도 반듯하게 표지를 힘주어 눌러 펴지도 않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밑줄을 긋고 낙서를 해가면서 읽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심지어 그들이 메모하며 읽을 책을 빌려보는 것도 좋아한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고 특정 부분에서 나와 어떻게 생각이 다른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용의 책(도서관 같은)을 함부로 훼손하는 일은 굉장히 싫어한다.
 

# 아몬드

드디어 읽었다. 그 유명한 아몬드. 본래 양장 겉에 종이 커버가 씌워져 있는 걸로 아는데 알라딘 중고 서적에 이 날따라 종이 커버가 없는 책들만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금 표지가 더러운데 중고 서적이 그런 맛이 아니겠나 싶어서 구매했다. 표지에는 되게 무심해 보이는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하필 내가 책을 안 읽게 된 해에 출간되어 학생이 아닌 성인이 되고서야 접하게 되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가사 없는 음악을 찾던 중 헌책방을 주제로 플레이리스트를 올려주신 분이 있었는데 그 플레이리스트 댓글에 여러 책들의 유명한 구절이 적혀있었다. 그중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던 게 아몬드의 한 구절이었다.
 

# 목차와 간단 리뷰

여러모로 바빠서 기차에서, 집에서 틈날 때마다 읽었다. 아무런 약속이 없었더라면 하루 만에 읽었을 거다. 그리고 이 책이 내용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구의 증명과 유사했다. 약간은 건조한 듯한 문체가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만든다.
 
주인공인 선윤재는 아몬드, 다른 말로 편도체에 이상으로 감정 표현 불능증이 있다. 그런 아이가 엄마와 외할머니의 지극한 노력, 곤이와 도라 그리고 다른 주변 인물들을 만나며 느끼는 모든 감정들과 변화를 윤재의 시선과 감정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에는 엄마가 윤재에게 감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라고 일러주는 식인데 윤재네 가족에게는 일종의 훈련이라고 불린다. 윤재는 엄마의 훈련을 그대로 외우기는 하지만 속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한다. 나는 그 생각을 읽으며 깊게 공감을 한다. 물론 엄마는 가장 ' 보편적인 ' 상황에서 할 법한 것들을 가르치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과 인생은 모르는 것 투성이가 아닌가. 초반의 감정이 배제된 아이의 생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다시 한번 깊게 느낀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마치 전자책에서 밑줄 그은 부분에 메모를 추가할 수 있는 것처럼 종이책을 읽었다. 아몬드는 화나고 슬프고 재미있고 따뜻한 부분마다 펜을 쥐게 만드는 힘이 있다.
 

P. 40
엄마의 말대로라면 사랑이란 건, 단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 따위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P. 59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P. 130 
난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는 걸 경계한단다. 사람들은 다르니까.

P. 132
할멈의 표현대로라면, 책방은 수천수만 명의 작가가 산 사람, 죽은 사람 구분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인구 밀도 높은 곳이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진 죽어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P. 161
이왕이면 즐겁고 예쁜 걸로 연습하려무나. 넌 백지나 다름없어. 그러니까 나쁜 것 말고 좋은 걸 많이 채워 넣는 편이 좋아.

P. 171
곤이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단순하고 투명했다. 나같은 바보조차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세상이 잔인한 곳이기 때문에 더 강해져야 한다고, 그 애는 자주 말했다. 그게 곤이가 인생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P. 179
- 사랑.
-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 예쁨의 발견.

P. 245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