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 _ 김연수 단편 소설 / 기억에 남는 문장

작년, 더위가 꺾이고 약간 서늘해지는 애매한 계절에 어디선가 흘끗 보고 지나쳤던 책. 표지가 너무 예뻤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아서 몇 시간을 검색하며 헤매다가 찾아냈던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표지와 제목을 보고 홀린 듯이 구매해서 읽었었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작가님의 책은 처음으로 읽어본다. 출판일이 6월 말인 것으로 보아 작가님이 여름을 위해, 여름과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신 게 아닐까 싶었다. 구매하고 속지를 살펴보다가 단편작이 실린 소설집이라는 것도 알았다. 소설집은 일상의 토막 시간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아하는 편이다.

늘 장편소설을 읽어도 여기까지만, 하며 한 호흡이 끝나는 지점까지 읽고야 만다. 때문에 도중에 끊기가 쉽지 않아 시간이 없으면 책을 펴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꾸 병렬 독서를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표지와 제목과 비등하게 나의 구매 욕구를 자극했던 띠지의 문장. '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 이유 없는 다정함이라니... 요즘 같은 세상에도 가능한 말인가, 하며 구매했다. 사실은 그런 이야기가 보고 싶었다.

 

# 목차와 플레이리스트

스무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전부 읽고 나면 두고두고 책장에 넣어두었다가 마음에 드는 단편을 다시 읽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특히 매년 여름마다.

그리고 책을 뒤편으로 가보면 이렇게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플레이리스트를 QR로 제공한다. 순서대로 스포티파이, 유튜브, 애플 뮤직에서 스트리밍 할 수 있다. 종종 책과 어울리는 노래들을 작게 틀어두고 책을 읽는 편이라 플레이리스트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34
1969년 여름도 지나갔고, 1984년 여름도 지나갔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해갔다. 그럼에도 그 레코드판은 그 시절의 상태 그대로,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P. 58
" 그래, 그런 거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더라도 그 좋은 기분만은 잃지 말자고 우리 오늘 약속하자. "

P. 80
누군가를 사랑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난다. 여기까지는 좋아. 그런데 다른 누군가를 또 직전의 누군가처럼 사랑한다? 이 부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아. 어떻게 두 마음 모두가 진심일 수 있다는 거지? 나 역시 시간이 흐르면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또다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겠지만, 그때 나는 내 인생이란 플롯도 논리도 없이 아무렇게나 써 내려간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어.

P. 104
" 제 말은 허공을 먹고도 배가 부를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

P. 114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말입니다.

P. 143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P. 166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P. 266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다음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하길. 그리하여 더욱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길.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읽으면 더욱 문장들이 와닿는다. 우리는 가끔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 위의 첫 번째의 문장을 떠올린다. 모든 게 변해가는 그 속에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을 때 읽으면 좋다. 1969년 여름도 지나갔고, 1984년 여름도 지나갔지만 우리에게는 매년 새로운 여름이 주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