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첫 소설, 로 유명한 여름과 루비. 시집은 막 찾아서 읽지는 않지만 가끔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진한 감정들이 좋다. 시인들은 어떻게 그런 짧은 문장들로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울게 하고 웃게 하고, 먹먹하게 만드는 걸까. 하고 감탄한다. 그러니 시인이 만든 소설이 기대가 안 될 수가 있나.
# 여름과 루비
이미 아는 사람은 안다는 박연준 작가님의 소설, 여름과 루비. 나에겐 제목의 루비가 석류 알갱이처럼 느껴져서 한 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 평상에서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신중하게 석류를 발라내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진짜 그런 건 아니고 여름과 루비는 어린 친구들이다. 여름이(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아이의 시선이라는 건 시와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시인의 소설이라 독특한 문체들이 종종 있다. 마치 시 같은 문장들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 목차 및 간단 리뷰
여름에게는 엄마가 없다. 그리고 아빠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어린 여름은 고모네와 함께 살게 된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친구 루비를 만나게 된다. 상처가 있는 두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며 서로를 알아가며 더욱 친해지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 놀랐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아서.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다 지나갔음에도 우리는 왜 그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사는가. 마음에 새겨진 것처럼.
그리고 제일 공감이 갔던 건 여름이의 마음이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오만함을 오랜만에 마주했다. 아이들은 모르는 게 아니다. 그저 어른들이 알 필요 없다고 하니 모르는 척할 뿐이다.
여름과 루비가 보여주는 크고 작은 사랑과 슬픔, 이별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추천한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19
나는 깜빡인다, 세상에서, 아주 작은 점처럼 깜빡이며 존재한다. 늘 존재할 수는 없다. 욕심쟁이들만 늘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는다. 잊는다는 것을 또 잊는다. 자주 울고, 웃는 것을 잊었다고 생각할 때만, 잠깐 웃는다. 사람들은 나를 고장 난 신호등을 보듯 바라본다.
P. 22
사랑이 시작되는 건 한순간이다. 미움이 쌓이는 데엔 평생이 걸릴 수 있지만.
P. 82
바보같은 믿음이었지. 아는가? 믿음은 바보에게만 허락된다는 걸. 바보들만이 믿고, 바보들만이 운다.
P. 98
나는 순진함이, 그리고 좋은 어른 한 명이 아이를 지킨다고 믿는다. 할머니는 나를 지키는 단 한 명의 어른이었다.
P. 138
겁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 나쁜 건 아니지만 나쁜 사람은 대부분 겁이 많다. 그들의 나쁨을 파헤쳐보면, 그러니까 그 끝의 끝까지 추적해 보면 결국 겁이 나타난다.
P. 160
허영의 뒷모습은 외로움이다. 그날 저녁 고모의 잠든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P. 193
모든 걸 괜찮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피로해진다. 괜찮지 않은 것도 괜찮게 보여야 하고 괜찮은 것은 더 괜찮게 보이려 하다 보면 거짓이 침투하고 외로움이 스며든다. 루비는 오랫동안 자기 삶을 괜찮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다 아이들의 적이 되었다. 루비의 거짓말은 견고해지고 아이들의 적의는 깊어졌다.
P. 197
어떤 이별은 깔끔하다. 사과 반쪽처럼. 나뉘고 먹히고 사라진다.
P. 258 - 전승민 평론문학가 -
여름과 루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왜 어떤 사랑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는지 묻게 된다. 사랑의 실패는 외롭고 힘들다. 별안간 혼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있던 언덕에서 내려와 각자의 언덕으로 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