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엉 _ 김홍 장편소설 / 형식 없는 믿음은 금방 무너지지 / 기억에 남는 문장들

나에겐 항상 책을 읽을 때 주변에 있어야 하는 게 있다. 잘 나오는 볼펜 한 자루와 손바닥만 한 작은 노트 혹은 메모지. 그리고 이 책과 어울릴 것 같은 책갈피와 인덱스. 책 한 권 읽는데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하냐, 싶을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걸 더 기분 좋게 해 주니까. 이 얘기를 한 이유는 바로 메모다. 책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두서없이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적는데 이 책은 이렇게 적혀있었다. " 작가님의 문장이 너무 웃김 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설인데도 빠져드는 매력이 있음. " 책을 다시 읽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짧게 남겨둔 문장을 보면 책의 내용이 기억날 때가 있다.

 

# 엉엉

제목부터가 궁금증을 자아낸다. 게다가 굉장히 독특한 표지까지. 볼링공 인간이 볼링공에 번호를 새기는데 도대체 무슨 조합일까... 싶어서 오젊작 시리즈 중에서도 보고 싶은 소설이었다. 이 책을 읽는 9월 기준으로 작가님의 신간이 8월에 나왔었는데 제목이 ' 여기서 울지 마세요 '였다.... 울음을 굉장히 좋아하시는구나, 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해하려고 하면 안된다. 처음에 ' 나 '와 나에게서 나온 ' 본체 '를 정의한다. 그래서 해리성정체장애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읽는데 ' 나 '가 주인공이고 나의 시점으로 ' 본체 '를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혼란이 왔다. 읽으면서 끄적인 메모를 보니 물음표 투성이다.

심지어 이 ' 본체 '는 해외도 자주 들락거리는데 어느 날 ' 나 '가 너는 나에게서 나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고 묻게 된다. 본체는 아주 당당하게 자기 여권을 보여주게 되는데 볼리비아 여권에 이름은 체/본. 그러니까 본체인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85 볼리비아(한화 15,000원 정도) 주고 발급받았다고 한다.

 

# 목차 및 간단 리뷰

난 그저 평범하지만 우울한 소설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던거다. 그래서 읽으면서 엉엉을 읽고 후기를 남긴 사람들의 포스팅을 몇 개 봤는데 다들 이해하기를 포기한 거 보고 웃겼다. 그렇지만 일상에 웃음이 필요하다면 이 소설을 추천한다. 보법이 남다른 작가님이다. 굳이 장르를 말하자면 현실과 판타지가 섞인 장르라고 해야 하나.

 

카페에서 친구와 책을 읽으려고 이 책을 가져갔는데 소리는 안내고 조용히 웃으면서 보고 있으니까 친구가 의아하게 봤다... 그래서 친구한테도 보여줬더니 웃는 사람이 추가되었다. 사고 친 본체 대신 ' 나 '가 잡혀서 경찰 진술받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 웃기다. 웃음이 필요한 사람들은 꼭 이 책을 봐줬으면 싶다.

그렇다고 마냥 웃기지만도 않다. 가끔 진지한 문장들이 훅 치고 들어온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다음에 다시 읽고 싶은 소설에 엉엉도 꼽고 싶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보통은 필사하고 싶은 문장에만 인덱스를 붙이는데 너무 웃겨서 붙이다 보니 빼곡해졌다...

P. 52
" 들떠 보여요. "
" 내가요? "
" 네. "
" 그런가? "
" 우울한 것보단 나은 것 같기도 하고. "
" 그래요? "
" 근데 조심해요. "
" 뭘? "
" 그럴 때는 항상 조심해야 돼, 원래. "

P. 61
" 하지만 형식 없는 믿음은 금방 무너지지. "

P. 130
그들이 주로 노리는 게 나였다. 본체는 없고 나는 있으니까 내가 동네북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P. 163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어려워진다. 일단 나 자신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하는 건지 남들이 원하기를 원해서 원하는 척하는 건지 확신하기 힘들고, 내가 원하는 바를 들은 상대방이 무언가를 요구받은 것처럼 느낄까 봐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P. 165
" 싸워볼 만한 일을 싸우지 않고 넘기는 건 좋지 않아요. 저쪽에서 만만하게 볼 거라고요. 다음은 뭘 요구할 것 같아요? "

P. 171
" 힘내요.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해요. "

동네북인 ' 나 '...😭 엉엉 울어도 좀 봐줘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