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 _ 천선란 / 그리울 때 랑은 무거워진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책을 읽는 게 즐거운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고 잘 안 읽히는 책도 그냥 읽으실까? 나 같은 경우에는 주로(99%) 소설을 읽고 가뭄에 콩 나듯 시와 에세이, 인문학 등의 장르를 읽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일단 책을 피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펴더라도 소설을 읽을 때는 하지 않던 병렬독서를 하며 그만큼 한 권을 읽는 데에 시간도 많이 소요되는 편이다. 그래도 중간에 덮는 일은 없다. 시집에서는 겨우 한 문장뿐이더라도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시가 있을 수 있고 에세이나 인문학에서는 알지 못했던 정보를 습득하기도 하기 때문에 즐겁지 않더라도 책을 편다.

 

# 랑과 나의 사막

천선란 작가님의 로봇 3부작 중 두 번째로 쓰인 소설. 나는 어쩌다 보니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되었다.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도서인데 판형이 작은 양장이라 책이 되게 귀엽다.

랑과 나의 사막이 핀 시리즈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책이어서인 건지 최근에 나온 것 중에는 이것만 가격이 올라 수정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일찍 살 걸...

 

# 목차 및 간단 리뷰

특이하게도 제목이 랑과 나의 사막인데 랑이 죽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배경은 49세기. ' 랑 '과 그의 아버지 ' 조 '가 발견해 고쳐준 로봇 ' 고고 '는 조가 죽고 나서도 랑과 함께 했다. 그런 랑이 죽은 거였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얼마 전에 돌아온 랑의 친구 ' 지카 '와 고고가 랑의 장례를 치러주고 그들은 각자의 여정을 떠난다. 지카는 바다를 향해, 고고는 랑이 보고 싶어 했던 유일하게 나무가 있는 과거로 가는 땅이 있는 곳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신한 게 ' 역시 나는 천선란 작가님이 보여주는 감정있는 로봇들이 좋다 ' 는 것. 여기에 나오는 고고에게도 여러 가지 따뜻한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말해보자면 고고가 이따금 꺼지고 머릿속에서 과거가 재생되는 결함이 생겼는데 랑에게 고쳐달라고 말을 꺼내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이유는 과거가 재생되는 것이 마치 인간이 ' 기억 '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신도 가지게 된 것 같아서. 뭔가 슬프면서서도 감동적인... 전부 표현할 수 없는 자잘하고도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문장이 아름다워서 몇 장 읽고 감탄하고 몇 장 읽고 인덱스 붙이고... 중단편의 소설인데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어찌나 많던지...😭

 

랑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책은 끊임없이 랑을 되살려낸다. 고고의 기억으로, 마음으로.

 

# 기억에 남는 문장들

P. 21
거치지 않은 감정은 지나가는 게 아니라 몸에 쌓인다.

P. 38
" 인간은 헛된 희망을 품는군. "
" 완벽한 희망을 품어야 하나? "
" ······. "
" 그게 말이 되는 문장이기는 하고? "

P. 41
' 마음에 드는 걸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
' 아니, 마음에 드는 걸 선물해야 해. 그래야 너한데 준 걸 내가 보고 싶어서 자꾸 너를 보러 오지. '

P. 111
한참을 걷다 멈춘다. 뒤돌아 본다. 돌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다시 걷는다. 문득 어느 곳으로 가도 랑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조와 함께 꼬박 두 시간을 걸어가야 나오는 식료품점을 갈 때와 지카의 집에 놀러 갔던 날을 제외하고 랑이 이렇게 오래 내 옆을 비운 적이 없었는데. 싱그럽던 랑의 움직임이 이 사막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기다려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이 이상함을 계속 이상한 채로 품어야 한다는 것까지 전부 끈적하게 등에 달라붙는다.

P. 125
그리울 때 랑은 무거워진다.

P. 133
"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

P. 135
그렇다고 믿고 싶다.
믿고 싶다는 걸 믿고 싶다.

P. 139
그리움은 시효가 기니까.

P. 144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