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 책을 소개하는 날이 왔다. 광인이라는 책인데, 나는 이 책에 많은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8월의 첫 책, 680페이지의 벽돌책, 1년쯤 뒤 재독하고 싶은 책. 사실 7월에 읽고 싶어서 구매를 했는데 내지가 찢어지고 찍힌 상태로 와서 교환하느라 8월에 읽게 되었다. 알라딘은 책 검수를 안 하고 보내는 걸까... 한 번 시킬 때 3권 이상 구매하는데 꼭 한 권씩 불량이 온다...
# 광인
처음 딱 집었을 때 든 생각은 꽤 가볍다, 였다. 양장도 아니고 페이지가 적은 것도 아닌데 내지 자체가 얇고 하늘하늘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밖에 들고나가서 읽기도 했던 책이다. 광인을 구매하면서 이혁진 작가님의 다른 책들도 살펴봤는데 이미 드라마화된 작품도 있었고, 눈여겨보고 있는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에도 작품이 있었다. 광인이 나에게 잘 맞는 소설이어서 다른 작품들까지 궁금해지는 작가님이다.
책의 디자인은 굉장히 깔끔하다. 흑과 백만 쓰인 책이 너무 예쁘다. 광인은 음악과 위스키가 언제나 배경처럼 깔려있는데 그래서 표지에도 위스키 잔을 투박하게 표현한 것 같다.
# 목차 및 간단 리뷰
준연, 하진, 해원.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음악 하는 남자 준연, 위스키 만드는 여자 하진, 안 해본걸 해보고 싶어 플루트 강의를 등록한 회사원 해원. 준연과 하진은 본래 친구이고 셋이서 만나게 된 것은 준연의 플루트 교습소에서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그 사랑이 평범하게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다. 비틀리고 어긋난 마음은 모든 것을 집어삼켜야만 꺼지는 불같이 타오른다. 적군도 아군도 가리지 못하는 사랑에 눈먼 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읽긴 했지만 별점 5점으로 기록하진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혁진 작가님의 후반부에는 여운이 있다. 무언가 끝이 났는데 끝이 나지 않은 기분. 그래서 만점으로 기록했다.
참고로 광인에는 사색이 많이 담겨있다. 호흡이 길고 두어 번 눈으로 다시 좇은 적이 있으니 그런 걸 선호하지 않는다면 이 책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위스키가 자주 등장한다. 맥주나 소주를 마시고 싶을 정도로 맛있게 먹는 드라마나 영화는 알고 있었지만 위스키를 마시고 싶게끔 만드는 책이라니. 다음번에 재독 할 때에는 위스키가 들어간 음료를 마시면서 읽고 싶다. 위스키 표현을 너무 잘하셔서 나도 하진이 만든 위스키를 맛보고 싶었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책이 인덱스에 가려질까 봐 최대한 자제해서 붙였다. 호흡이 긴 문장들이 많아 손으로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필사가 즐거웠다.
P. 21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P. 48
그나마 제가 알게 된 건 어떤 구덩이에 빠졌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죠. 누구나, 돈이 많든 적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큰 회사를 다니든 작은 회사를 다니든, 살다 보면 구덩이에 빠져요. 그렇잖아요? 구덩이는 그냥 구덩이일 뿐이고요. 이름표가 붙은 것도 누굴 가려 받는 것도 아니죠. 더 깊고 덜 깊고 그 차이 정도야 있겠지만 결국 사람이란 자기가 빠진 구덩이가 제일 깊고 막막하기 마련이고요. 준연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만, 왜 하필, 왜 내 구덩이만,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럴 시간이 없으니까요. 구덩이에 빠졌으면 닥치고 빠져나와야 해요. 기를 쓰고 어떻게든 기어 올라와야죠.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건 구덩이가 아니라 그 구덩이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느냐니까요.
P. 85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분명하겠어요.
P. 160
사랑은 거저 생기는 게 아냐. 알아야 생기고 아는 만큼 생기는 거지. 시간이 필요해. 그걸 아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P. 161
감정이라는 건, 마음이라는 건 왜 한 겹이기만 하질 않을까. 왜 좋은 건 좋기만 하지 않고 싫은 건 싫기만 하질 않을까.
P. 167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어. ··· 우리 다 어떤 사람들만 만족시킬 수 있을 뿐이야. 문제는 얼마나 확실하게, 치밀하게 만족시킬 건가지.
P. 180
사랑이란 어쩔 수 없이 그랬다. 분명하고 열렬하지만 그만큼이나 선별적이고 차별적이다. 사랑은 늘 오려낸 것처럼 선명하니까.
P. 272
우리가 한 때 특별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나중에 얼마나 평범했는지, 단지 평범했을 뿐인데 우리가 특별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얼마나 크게 실망하고 다퉜는지. 너무 쉽게, 관계를 깨뜨리진 않았는지.
P. 280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P. 569
왠지 모르겠지만 사랑은 늘 조금 부족한 곳으로, 채워짐이 필요한 곳으로만 흘러가죠. 사랑이 채우는 거니까, 채워지지 않는 것까지 채울 수 있는 게 사랑이니까.
P. 575
우릴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이 우릴 그만두지 않게 해 주죠. 오직 우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우리에게 그만두지 말라고 부탁해요.
P. 619
당연한 일들은 실은 당연해 보일뿐 조금도 당연하지 않았다.
P. 655
사랑은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과 가장 먼, 반대편의 끝에 있는 죄까지도 진실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었다.
P. 665
사랑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